무라세 다카오, 요리아이의 숲 노인요양보호소

  1. 자유롭지 않게 된 몸은 나에게 새로운 자유를 가져다준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게 됨으로써 나는 시간에서 자유로워진다.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림으로써 부모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신선하다. 분노와 증오에서 잘 벗어나게 되고, 기쁨을 느끼기 쉬워진다.

  2. 내가 지니고 있던 자기 개념이 무너지는 동시에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했던 규범에서 해방된다. 나라면 이래야 한다는 믿음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자유가 생겨나는 것이다.

3)그렇게 되면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화하여 새로운 ‘나’로 바뀔 뿐이다. 돌봄이란 그 과정을 함께하는 일이 아닐까.

  1. 몸이 점점 자유롭지 않게 되면서 사회의 개념적인 것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늙는 것이라고 한다면, 노쇠의 세계란 과연 어떤 곳일까.

  2. ‘늙음’이란 ‘노쇠 = 기능 저하’라는 등식에 전부 담을 수 없는 생기 넘치는 과정이다. 호들갑스럽게 말하면 번데기 속에서 몸이 걸쭉하게 녹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듯한, 역동적이고 극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aside> 💡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에서 애벌레가 나비로 탈피하는 과정을 상상한다. 그 책에는 나비로 탈피하여 세상을 날아가는 장면은 있지만 나비가 죽어가는 과정은 없다. Aging을 통해 사람은 계속 변화하고 새로운 나로 바뀐다. 아이가 탈피할때는 부모가 함께 하지만, 장년이 노년으로 바뀌는 과정은 오롯이 혼자이다. Aging의 과정 중에 있는 나도 새로운 나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side>

컨디션 최상의 죽어가는 몸

  1. 총체적으로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세포들 하나하나는 활기차게 활동한다. 얼마 남지 않은 비축분을 세포와 기관들이 나누어서 순환을 일으키며 불태운다. 그 협력과 연계는 몸의 역사상 최상의 컨디션으로 이뤄진다. 사람은 마지막에 죽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aside> 💡 이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사람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마지막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몸의 기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해가면서. 매일 나의 몸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협력하고 있다. 내가 불평하는 순간에도, 내가 열심히 사는 순간에도. 내 몸은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aside>

멍하니 있으면 느껴지는 것

  1. 목적이 앞서는 돌봄은 일방적인 폭력을 잉태하기 쉽다

  2. 물론기록으로 배뇨간격을 파악하는 것을 비롯해 좋은 돌봄을 실현하기 위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돌보는 사람의 의식이 너무 앞서 나가면 노쇠한 몸에서 나오는 신호를 잡아내는 감수성을 기를 수 없다.

  3. 할 것이나 해야 하는 것으로 머리도 몸도 가득해지면 어르신들의 몸이 내는 미약한 신호를 받아들일 여백이 생겨날 수 없다. 목적, 가치, 의미로 빈틈없이 메워진 돌봄에는 어르신들을 일상생활에서 멀리 떨어뜨리는 측면도 있다.

  4. 돌보는 사람의 몸에 여백을 기르려면 때로 멍하니 있을 필요가 있다. 멍하니 있으면 감각기관이 열리기 시작한다. 일단 감각이 열리면 주위의 온갖 것들과 교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노쇠한 몸의 소리 없는 목소리가 돌보는 사람의 몸에 축적된다.